12/29/2001

이런 것이 순리?

12/29/2001 07:14:00 PM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햇살은 따뜻하고 눈은 차며
바람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뭔가를 잘하기보단 못하는 것이 쉽고
잘못을 지적하기보단 말없이 지나버리는 것이 편하다.
왜 사람일에선 뭐든 나쁜게 좋은 것보다 쉬운 걸까?

12/16/2001

Turn-Push-Click

12/16/2001 07:21:00 PM

TV에 전원을 연결하거나 채널을 선택할 때 우린 흔히 [틀다]라는 동사를 쓴다.
[튼다]라는 말은 무언가를 [돌린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하지만 요즘 TV에는 돌릴만한 무언가는 없다.
단지 가벼운 터치만으로도 눌려지는 버튼들만 있을 뿐.
그리고 누가 TV 본체의 버튼 쓰기라도 하나.
리모컨이 주위에 없으면 음량 조절이나 채널을 바꾸는 것도 하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니다.
영어에서도 TV를 켠다는 단어는 [Turn on] 이다.
[Turn]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돌린다는 의미의 가진 단어.

왜 그렇게 됐을까.
답은 간단하다.
TV가 이 세상에 소개된지 100년이 되지 않았고,
집집마다 TV를 다 가지게 된 것은 50년이 되지 않았다.
20년전 TV의 채널은 분명히 돌리는 것이었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트트틋.
볼륨을 계속 낮추다 보면 전원이 꺼지기도 했다.

우리의 부모님이, 그리고 우리가 어릴 때 보던 TV들은
분명히 [틀어야] 하는 것이었다.

요즘 TV는, 특히 케이블TV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야(Push)]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TV를 [틀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TV 보는 시간의 상당부분을 대체해가고 있는 인터넷에서는
[누르기] 대신 딸깍~하고 [클릭하기(Click)]를 주로 하고 있다.
실로, [누르기]는 그 지배기간이 [틀기]에 비해 턱없이 짧았으며
이제는 [클릭하기]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한다.

아직 TV를 [틀거나 돌리는] 세대가 세상의 메인이지만,
[클릭하는] 세대가 메인이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보여줄 수 없는 불행

12/16/2001 07:18:00 PM

걸어가는 사람의 외투를 벗기기 위한 해와 바람의 내기에 관한 우화가 있다.
결국 외투를 벗게 한 것은 몰아치는 폭풍이 아니라 내리쬐는 햇살이었다.

행복은 햇살과도 같아 감추려 해도 감추기 어렵다.
아무리 감추어도 행복으로 반짝이는 눈빛과 얼굴의 홍조를,
손끝의 따뜻한 기운까지 가릴 수 없다.
게다가 누구도, 행복을 감추라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행복은 샘이 나기도 하지만,
일순간 대리만족과 함께 내게도 그런 행복 올까하는 기대도 슬쩍 품어본다.

불행은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다.
누구도 불행을 품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막상 불행을 안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보이기 보다는 감추려 한다.
그리고 누가봐도 불행한 삶을 스스로 불행하지 않다 말하는
이들을 오히려 훌륭하다 칭한다.
불행에 동정받길 원하지 않고, 불행이 전염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행복은 너무 커서 보여주고 싶은 많큼 보여줄 수 없으며,
불행은 너무 깊어 보여주고 싶어도 꺼내어 보여줄 수 없다.

그렇다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 아주 작다 함은 무엇인가.
보여줄 수 있음이 작다면 사랑은 본질적으로 행복한 것인가.
사랑은 그 자체로 행복인 동시에 불행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감정보다 복잡미묘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작은 부분만.

누구나,
보여줄 수 있는 작은 행복과
보여줄 수 없는 큰 불행을 안고 산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다.